양헌수(梁憲洙)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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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 장군
양헌수 장군
정족산성
정족산성
전등사
전등사
덕진진
덕진진

유장 양헌수

1816(순조 16)∼1888(고종 25).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시호는 충장(忠裝).

부사정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보수적인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유장(儒將)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가난하여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대과(大科)를 기다리지 않고 1848(헌종 14)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철종 때에는 참상관(參上官)에 올랐다.

1865(고종 2)년 제주목사로서 전 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징치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이해 가을 극심한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해를 더 잉임(仍任)하였다.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다

1866(고종 3)년 어영청의 천총(千摠)으로 준천사(濬川司)의 도청(都廳)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하여 정족산성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李容熙)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別軍官) 이현규(李鉉奎)와 함께 17명의 초관(哨官)과 경초군(京哨軍) 121명, 표하군(標下軍)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염하손돌목을 건너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을 지키던 중,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Rose)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Ollibier)의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30며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떠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고, 1869(고종 6)년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71(고종 8)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別衛士制度)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잉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1873(고종 10)년 어영대장, 1874(고종 11)년 좌변 포도대장, 1875(고종 12)년 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8일 뒤에 금위대장이 되었다.

개국을 반대한 척화론을 주장

1876(고종 13)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이용희 등과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82(고종 19)년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민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척족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 때 조영하(趙寧夏)· 김병시(金炳始)· 김기석(金箕錫)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

1884(고종 21)년 공조판서, 1887(고종 24)년 독련사(督鍊使) 가 되었다.

관련 사이트

정족산성 :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의 산. 삼랑성.

전등사 :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성 내에 있는 사찰. ☎032-937-0125

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

손돌목 : 손돌풍 전설의 무대, 덕포진손돌목돈대 사이의 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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