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이규보

고려시대의 문관, 재상으로서 초명은 인저(仁근본저),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 지헌(止軒) 시호는 문순(文順). 본관은 황려(黃驪,驪興).

1168(의종 22)~1241(고종 28)

시, 술, 거문고를 좋아한다 하여 삼혹호선생이라 고도 하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성장 및 경력

9살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읽기 시작하여 문재가 뛰어남을 보였고, 14살 때에는 시를 빨리지어 이름을 높이는 등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형식주의에 젖은 과거시험의 글을 멸시하여 사마시에는 연속으로 낙방하였다. 16세 부터 약 5년간 자유분망하게 지냈다.

1189년(명종 19)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 다음해에 예부시에서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25세 되던해에는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세상을 관조하며 지낸다.

26세(1193년)에 다시 개경에 돌아왔으나, 가난에 쪼들리게 되고, 이 때, 동명왕편, 개원천보영사시 등을 짓는다.

1197년에 최충헌정권의 요직에 있었던 조영인, 임유, 최선 등에게 30세 되도록 관직이 없음을 통탄하며 지방관이라도 달라는 서신을 썼다. 32세(1199년, 신종 2)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으로 공로가 매우 큰 사람임을 칭송하는 시를 읊고 나서야 전주목의 사록겸장서기가 되었으나, 동료의 비방에 의해 1년 4개월만에 면관되었다.

1202년(신종 5)에 농민폭동진압군의 병마녹사 겸 수제로 자원종군하고, 1년 3개월 만에 돌아왔으나 상을 받지 못하여 좌절하였다. L() 1207년(희종 3)에 최충헌에 의해 직한림으로 발탁되어, 참군사, 사재승, 우정언을 거쳐 1217년(고종 4)에 우사간이 되었다.

이해 가을 최충헌의 한 논단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로 인하여 정직당하였고, 3개월되에는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1219년(고종 6)에 좌사간 때,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한 죄로 면직되었다가 최이의 후견 덕분으로 계양도호부부사가 되었다.

최충헌이 죽고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자 이후 최이에게 절대적공순관계가 된다. 1220년(고종 7)에 예부낭중이 되고 한림시강학사를 거쳐 위위시판사가 되었으나, 1230년 팔관회에서 잘못을 저질러 위도에 유배되었다. 최이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배제하는 또 다른 힘을 알게 된 이규보는 보신을 잘 못한 자신을 통감하였다.

8개월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와 이해 9월부터 산관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작성을 담당하였다.

1232년(고종 19)에 비서성판사에 승진하고,이듬해 집현전대학사, 정당문학, 참지정사, 태자소부 등 지냈다.

1237년(고종 24)에 문하시랑평장사, 감수국사, 태자대보 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저서 와 작품

저서 :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시 : 천마산시, 모중서회, 고시십팔운, 초입한림시, 공작, 재입옥당시, 초배정언시, 동명왕편

글 : 모정기, 대장각판군신기고문

후대의 평가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문관이었고, 양심적이나 소심하였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즉흥적으로 의식에 떠오르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문을 세우고, 본인의 문명을 떨치려는 명예심에서 입신출세주의자, 보신주의자가 되었다. 최씨정권하의 일반 문관리의 전형이다.

추천 사이트

이규보묘 : 고려시대 문호, 백운 이규보. 길상면 길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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