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령, 조선왕조 제25대 왕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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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그림)
철종(그림)
용흥궁
용흥궁
철종외가
철종외가

철종

1831년(순조 31년)~1863년(철종 14년).

조선 제25대 으로 1849년 부터 1863년까지 재위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이름은 이원범(李元範)이고, 왕위에 오른 후의 이름은 이변(李曰弁) 이다. 자는 도승(道升)이며 호는 대용재(大勇齎) 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 이인(李示因)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대부인(龍城大夫人) 염씨(廉氏)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1831년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강화도령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懷平君) 이명 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교동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용흥궁자리의 초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이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純祖妃)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김조순(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뒤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서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수렴청정

이 때 나이가 19세로 어리고 농경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의 딸을 왕비[명순왕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국구(國舅)로서 왕을 돕게되니 정권을 장악하여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였다.

친정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1853년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5만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심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의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주어 구활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 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점차 나이가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면서 1859년 부터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1861년에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 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1862년 2월 경상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임술농민항쟁].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했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이整廳)을 설립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개혁[삼정구폐(三政救弊)]을 공포하고, 관료들과 재야 유생층에게 개혁책을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이 때 마련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를 일체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고,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서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려는 동학(東學)이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되고 확산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혹세무민(惑世誣民)] 죄를 물어 처형하였다.

철종 재위 기간 동안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사상과, 만민평등(萬民平等)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이 일반 민중과 세력을 잃은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었다.

철종 또한 여색(女色)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에 사망하였다.

수용(目卒容)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하였으나 3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1865년(고종 1년) 4월 7일 경기도 고양(高陽)의 희릉(禧陵)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관련 사이트

철종실록 : 조선 제25대 왕 철종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술한 책.

용흥궁 :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철종의 잠저.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20호.

철종 외가 : 철종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 지방문화재자료 제8호.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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